양들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
순교자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뜻을 따라 신학교에 들어간 그는
일제 강점기인 학창시절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쓰는 이른바 깡다구도 있었다.
그런 그를 하느님은 눈여겨 보셨기에
남들처럼 보통의 삶을 살고 싶어했던 그를 조금도 변함없이 사제의 삶으로 이끄셨다.
1969년,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그는 전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도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그의 세계 가톨릭 교회에서의 위상은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장례미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제단에서 대표로 미사를 집전하는 4명의 추기경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깡다구는 대한민국 인권과 민주정의가 독재와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짖밟히고 있을 때 빛을 발하였다.
1968년 2월 9일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김수환 주교는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서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나,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에 대해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섰다.
그렇게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었고, 그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해 있던 명동성당은 민주화 성지였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 명동성당에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에서도 그는 앞장서서 약자들을 보호했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세상의 약자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관심은 도시빈민, 탈북민, 외국인 노동자, 성매매 여성, 미혼모, 철거민촌 무주택자 등 매우 다양한 소외 계층으로까지 확산됐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당시 나는 모 국제행사의 기획에 참여했는데,
그 중에서도 개회식 담당이라
환영사, 개회사, 축사 등 연설문과 연설자 섭외, 내외빈 초청 등 각종 관련업무도 내 업무 중 일부였다.
상부로부터 연설자로 김수환 추기경님을 섭외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고,
혜화동 추기경 공관을 찾아갔는데
비서 수녀님은 자리를 비우신 상태여서
공관 구경 좀 하겠다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그곳에 있었을까...
마당 저 편에서 하얀 모시옷을 입으신 아담하지만 선한 느낌의 노인 한 분이 조용히 걸어오시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분이 추기경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릴 정도로 그동안 뵌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비서 수녀님께 행사에 대한 설명도 드리고, 연설문 원고도 전달했지만,
그 날 나는 상부에 보고 드렸다.
추기경님 건강이 염려될 정도라 차마 연설 요청을 못 드리겠더라고...
그리고 얼마 후 그 분의 선종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사회의 큰 어르신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요즘 그 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