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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아래서 / 박노해
이럴 때가 있다
일도 안 풀리고 작품도 안 되고
울적한 마음으로 산길을 걸을 때
툭, 머리통에 꿀밤 한 대
아프다 나도 한 성질 있다
언제까지 내가 동네북이냐
밤나무를 발로 퍽 찼더니
후두두둑 수백 개의 밤톨에 몰매를 맞았다
울상으로 밤나무를 올려봤더니
쩍 벌어진 털복숭이들이 하하하 웃고 있다
나도 피식 하하하 따라 웃어 버렸다
매 값으로 토실한 알밤을 주머니 가득 담으며
고맙다 애썼다 장하다
나는 네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살아나온 그 마음을 안다
시퍼런 침묵의 시간 속에 해와 달을 품고
어떻게 살아오고 무엇으로 익어온 줄 안다
이 외진 산비탈에서 최선을 다해온 네 마음을―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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